규정되지 않은 독선 인문학 읽기

근대의 대표적인 지식인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자신의 마지막 에세이인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에서 장기를 두는 기계가 구성하는 우스꽝스러운 상황들을 변증법적 역사관에 비유하였다. 그는 항상 승리자일 수밖에 없는 이 역사관에 대해 조소를 보낸다. 실제로 변증법이 제시하는 역사의 끝은 항상 절대정신, 혹은 유토피아가 자리하는 위대한 승리자의 세계의 공상에 기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발전적 경향의 중심에는 헤겔과 맑스가 있다. 비록 벤야민의 역사관은 이러한 변증법적 역사관이 추구하는 기저와는 다른 유태교적 배경이 깔려있지만, 기본적으로 언제나 승리자일 수밖에 없다는 측면에서 종교적 영감과 변증법적 기계론은 서로 조우할 수 있었으며, 또 다시 서로의 차이 때문에 갈라질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태생부터 갖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영국의 대표적인 사회학자인 앤서니 기든스(Anthony Giddens)에 따르면, 사회학의 차원에서 맑스를 평가하는 방식들에 재미있는 차이가 존재한다. 하나는 맑스를 사회학 이전의 선구자적 인물로서 보는 쪽이고, 다른 하나는 맑스를 중심으로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 속에서 활동한 사회학자들은 그저 맑스 사회학의 응답으로서 취급하는 쪽이다. 첫 번째가 일반적인 사회학자들의 관점이라면, 두 번째는 맑스주의자들의 것으로 생각할 수 있겠다. 이처럼, 변증법을 품에 안은 쪽은 항상 독선과 독단주의의 상징이 되곤 했다. ‘어째서 그들은 다른 것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일까.’ 하는 제 3자들의 지적에도 맑스주의자들은 고집스럽게 그 자리를 지키는 경우를 더러 경험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논의에 대해, 혹자는 믿음에 기반한 신을 상정하는 종교에도 유사성을 발견하여 종종 이들과 같은 배에 태우곤 하는데, 필자는 이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 분명, 하나의 노선과 발전 경향을 고집하고는 있지만 헤겔과 맑스, 그리고 종교와의 관계는 상당히 미묘하다. 먼저 맑스라면 두말할 필요가 없겠지만, 루터교를 믿었던 헤겔도 종교와의 거리가 있다고 언급한다면 일부의 독자들은 다소 놀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헤겔은 신학과 철학을 자신의 논리를 전개함에 있어 엄격하게 구분한 것으로 보인다. 헤겔 연구가인 클라우스 뒤징(Klaus Düsing)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의 역사철학강요에는 중세철학의 설명이 ‘건너뛰어져’ 있다. 따라서 종종 헤겔의 번역서에는 ‘신’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데, 이는 벤야민의 번역서에 등장하는 ‘직관’이라는 단어만큼이나 위험한 곡해를 유발할 수 있다. 그의 절대정신과 신의 유사성은 신플라톤주의 철학과 중세 신학의 유사성을 논하는 것과 같은 맥락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헤겔과 맑스의 독단성에는 종교적 초월성과는 별개의 논리가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여기서 그들의 변증법이 어떤 배경에서, 어떤 논리적 구조를 갖고 있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생략하겠다. 분명히 밝힐 수 있는 것은 그들의 변증법에 따르면, 일관적인 발전적 방향이 있으며, 이들의 끝에는 항상 희망적이며 이상적인 대상이 설정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 뒤따른다. 이에 대해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테오도르 아도르노(Theodor Adorno)의 부정변증법이나, 이들의 발전적 경향을 하나의 지식의 인식 틀로서의 에피스테메(Episteme)로 격하시킨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등, 셀 수 없을만큼 많은 철학자들이 그들의 발전적 논리를 비판하였고, 최근에는 맑스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순수 사회주의 운동보다는 사민당의 강세를 통해 유물화된 변증법적 논리의 위기가 찾아온 듯했다.

그럼에도 변증법을 믿는 이들의 논리는 아이러니하게도 여전히 강력하다. 그들의 발화에서 등장하는 즉자와 대자의 관계, 다시 말해 자신들이나 혹은 자신들의 주변에서 벌어지는 소위 ‘일탈’적 행위는 그들의 ‘대자’로서의 관계를 갖지, 그 관계로부터 벗어나지는 못한다는 것이 그 요지이다. 위에서 언급했던 맑시스트들의 고집도 여기에서 기인한 듯하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탈구조적인 입장 또한 결국 구조와 이성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다만 그들의 발언은 오로지 대자적 입장에서 서술될 뿐이다. 비토리오 회슬레(V. Hoesle)의 말처럼, 과거 이성으로 구축된 체계를 무너뜨린 이들에게는 이성이 있기 때문이라는 탈구조주의자들이 지니는 자기모순적인 부분은 여전히 넘어서지 못한 것이다.

실례로 전통적인 구조에 대항했던 수많은 철학자들은 묘한 공통점들이 있다. 그들은 전통 구조와는 묘하게 소외된 곳에 있었다. 탈구조주의를 발화한 프랑스는 관념론이 득세한 독일이나 분석철학 쪽으로 기울어진 영국과는 거리가 있는 위치다. 또한 최근에 각광을 받고 있는 이러한 학자들의 뒷면에는 그동안 사회에서는 저평가되거나 용납되지 않는 금기적 계층이거나 혹은 그러한 극단적인 선택을 거치지 않고서는 도저히 위로 올라서기 힘든 고착화된 구조와 맞닥뜨리고 있었던 것이 명백한 사실인 것이다. 루돌프 카르납(Rudolf Carnap)이 이야기했듯, 인간의 언명들 중에서 분석철학에 속하지 않는 분야에는 그들의 심정이나 소망을 대변한다는 명제가 여기에도 매우 적절하게 적용되는 듯하다. 물론 카르납 그 자신까지도.

벤야민의 말처럼, 어쩌면 이 규정되지 않은 독선의 끝은 역사의 끝에 가서야 결판이 날 문제인 것일까. 헤겔의 역사는 끝에서부터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라는 언급이 문득 강렬하게 와닫는 것은 어찌할 수 없을 듯하다. 최근에 그러한 포스트모더니즘적 경향에 반발한 객관적 관념론이나 헤겔주의적 분석철학의 재논의가 발생하는 것을 보면, 정말 즉자와 대자의 관계, 유치한 표현을 빌리자면 정과 반의 다툼으로 분리와 회귀를 반복하는 점점 더 커져만 가는 거대 지성 속으로 수많은 학자들이 지녔던 일탈의 꿈들이 하나씩 꺼져만 가는 것 같다. 과거의 구조를 지양해낸다는 꿈 또한, 결국 과거의 구조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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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말엔가, 철덕질 좀 하다가 쓴 글.
뭔 책을 봤었던 것 같은데 책 제목은 기억이 안 난다. 단수가 아니라 복수라서 그런 것 같다.
지금 나에게 이 글이 흥미로우면서도 유치하게 읽히는 걸 보면 난 아직도 성장할 희망이 있는 것 같은데, 아직도 이 때 문제제기했던 내용에 대해 명확한 답은 찾지 못했다. 아마 안 될 거야.(응?)

요번엔 퍼플 횽이 원고 채워넣기 용으로 쳐넣은 잉여 글이 된 것 같다. 밥 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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